“눈 안 보여도 무대가 마음 편해요, 날 살아 있게 하니까”

연극 ‘메리 크리스마스, 엄마’ 손숙

연극 ‘메리 크리스마스, 엄마’에 출연하는 배우 손숙은 “물질적 가치가 정신적 가치를 잠식해가는 한국 사회를 닮은 이야기라 쓸쓸할 것”이라고 했다. /남강호 기자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아들(서상원)이 방문하자 요양원에 있는 엄마(손숙)는 마음이 들뜬다. 가족과 함께 밖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사업을 키우려면 엄마 땅을 팔아야겠어요.” 연극 ‘메리 크리스마스, 엄마’(연출 이병훈)는 땅을 처분하겠다며 서명을 요구하는 아들과 그것에 반대하는 엄마를 들여다보는 2인극이다. 독일 희곡이지만 우리 사회와 겹쳐지는 불편한 응어리가 있다.

지난 4일 광화문에서 만난 배우 손숙(78)은 “물질적 가치가 정신적 가치를 잠식해가는 한국 풍경 같은 이야기”라며 “부모든 자식이든 공감할 대목이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故) 박경리 선생님이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고 하셨는데, 저도 물건이든 인간관계든 많이 정리하고 있어요. 파주 어느 한옥 성당에 ‘들어갈 집(납골당)’도 마련했지요.”



배우 손숙 인터뷰 /남강호 기자 



연극 ‘메리 크리스마스, 엄마’에서 엄마는 얕은 치매가 있다. 우리 노인을 보는 것 같다. 배우는 경기 고양 집과 서울 종로 연습실을 지하철로 오가며 노인들을 관찰한다고 했다. “지하철을 타면 노인들만 보여요. 남자들은 모자 하나 쓰고 패딩을 입었어요. 여자들은 배낭을 하나 메고. 쓸쓸하면서도 미워요.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노인들이 일단 배려가 없어요. 큰소리로 통화하고 술 먹고 떠들고. 여유도 없고 화가 나 있는 것 같아요. 건드리기만 해봐라, 이런 느낌. 나도 그렇게 보이겠지요?”

수명은 길어졌지만 노년만 연장된다. 손숙은 황반변성으로 시각장애5급 판정을 받았다. 대본을 큰 활자로 인쇄하고 돋보기로 읽는다. 외우기 어려울 정도이고 연극을 보러 가도 소리만 듣고 온다고 했다. 손숙은 “우리는 노인으로 공경 받지 못하는 첫 세대일 것”이라며 “상대적 박탈감도 있고 ‘출산율은 계속 떨어지는데 노인은 누가 먹여 살리나’ 하는 걱정도 든다”고 했다. “‘좋아하는 연기도 오래 못 하겠구나’ 싶은데 집에 있으면 아픈 것 같아 연습실이나 촬영장 가는 게 마음 편해요. 나를 살아 있게 하는 곳이니까. 내년이 데뷔 60년인데 몇 년 전부터 들어오는 배역들은 거의 다 ‘치매 노인’이에요(웃음).”

손숙이 주연하는 연극 '메리 크리스마스, 엄마'는 늘푸른연극제 참가작이다. 극단 춘추의 '물리학자들', 극단 시민극장의 '몽땅 털어놉시다', 방태수 연출의 '건널목 삽화' 등 4편이 공연된다.

손숙은 김은숙이 쓰고 송혜교가 주연하는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에 출연할 예정이다. 영화 ‘미나리’의 윤여정,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오영수는 갑자기 세계적인 배우가 됐다. 손숙은 “살다 보면 저럴 수도 있구나. 꾸준히 열심히 했으니 대운(大運)이 들어온 것”이라며 “호주에 사는 손자는 한국말을 못 하는데 ‘오징어 게임’ 보더니 한국말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고 전했다.

한국 최초로 햄릿을 연기한 고(故) 김동원은 말년에 대사를 못 외울 때에도 연극 ‘물보라‘ 무대에 올랐다. 객석을 등진 채 동네 사람들 틈에서 막걸리를 마시는 게 전부였다. 대사는 한 마디도 없었다. 손숙은 “당시 나도 출연했는데, 나이 들면 저런 모습이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시력과 청력이 나빠지지만 이 정도라도 보고 들을 수 있어 감사해요. 좋은 노인으로, 폐 끼치지 않고 살다 갔으면 좋겠어요.”

연극 ‘메리 크리스마스, 엄마’(24~27일 JTN아트홀)는 17일 개막하는 늘푸른연극제 참가작이다. 엄마는 결국 서명을 하고 아들은 떠난다. 크리스마스에 집에 갈 수 없는 노인들이 모여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합창한다. 음정도 박자도 맞지 않는다. 그래서 더 슬프다.



박돈규 기자 coeur@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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